일년에 적어도 한번 씩, 조슈아 트리에 신세를 진 것이 십년이 다 되어간다.
사막 특유의 모든것을 다 수용하는듯한 고요함.
강한자만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세계가에서 살아나가는 작고 재빠르고 터프한 생명들,
죽은 벌레의 시체를 오분안에 수거해가는 사막의 파괴력과 엄격한 질서가 경이롭고 사랑스럽다.
사막에서 있었던 일은 사막에 머문다.
사막에서 나를 괴롭히는 공포와 혐오는 사막을 떠나면 먼 이국의 일처럼, 모래처럼 바스라진다.
다음 해, 돌아와서 차에서 내릴 때까지.
이번에도 사막의 뜨겁고 건조한 공기가 귀가 먹을것 같은 적막함과 함께 피부에 와닿는 순간
지난 해 버리고 왔던 나의 고뇌와 감정적 오징어굽기가 죽지도 않고 또온다.
이번 사막 여행에 나는 헌터 S. 톰슨의 <라스베거스에서의 공포와 혐오>한 부를 달랑 들고갔다.
사막의 열기 아래 무력하고 흉칙한 인간의 주지육림, 타고난 몸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
그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아메리칸 드림.
백인 남자가 아닌 나에게는 내 감정의 살풀이를 대신 해줄 변호사 닥터 곤죠가 없다.
나는 사십 넘은 미혼 이민자 여성이며, 2025년, 얇게 벼려진 현대 고도 자본주의 사회를 살기에
마약으로 자유와 일탈을 기도할 깜냥도 사회적 허용도 없다.
늘 그래왔듯, 나에게는 나와 내 자아와 나 자신뿐.
사막으로 들어가기 전과 후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늘 끝을 걷고 작은 링을 통과하는 것 같이 성공과 실패로 갈리는 평가와,
그 사이사이에서 삶은 감자처럼 힘없이 이지러지는 사람과 관계들 뿐이다.
그래서 써본다. 사막에서의 공포와 혐오를, 곤죠스타일로!
감정은 근육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도 많은 근육들 중 하나일 뿐.
감정은 실제 역할에 비해 의도치않은 스포트라이트와 건강하지 못한 관심을 한몸에 받는다.
많은 학생 중 괜히 눈에 띄는 그 한명, 학생회장처럼.
2021년, 나는 마침내 MBA를 받았고, 그로부터 몇달 지나지 않아
지금까지 가장 헌신했던 회사에서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았다.
회사에서 잘린 지 삼일 후, 같이 살던 연인이 짐을 싸서 나갔다.
그 시기에 감정의 근육이 끊어지고 파열된 듯 매일 아팠다.
사막은 포용적이다.
조용한 모래바람이 온갖 모자라고 적당히 악한 존재들을 어머니의 담요처럼 고요하게 덮어준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마치 나에게 벌어진 일은 소나기나 서풍처럼 고대부터 되풀이되어 오던 것이어서,
설명이 불필요하다는듯이.
그 뜨거운 포옹을 덮고 한동안 끙끙 앓다가 부스스 털고 일어나면
조금은 상처가 아문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