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rderland Dispatch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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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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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na
Nov 2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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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이십 년 동안 절필하고 글을 다시 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내가

다시 글을 쓰게 된 계기를 지금 생각해보자면, 어떤 남자를 만난 탓이었다.

그 남자는 옥스포드 영문학과를 나와 두 권의 책을 출판한 현역 작가였다.

구글에 이 남자 이름을 치면 가죽 자켓을 입은 그가 야심찬 젊은작가답게 크리피한 눈을 번들거리며

책벌레같이 생긴 여자 둘을 양 쪽 팔에 끼고 찍은 사진이 나온다.

그 남자가 쓴 소설을 찾아 첫머리를 읽어보았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죽었다. 나는 오히려 그 편이 좋았다. 어머니를 독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 나는 읽기를 그만두었다.

그 남자는 핑크색 돼지를 연상시키는 중년의 근육이 부족하고 통통한 백인 남자였다.

코로나가 성행하던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인 엑스를 따라 그곳으로 이민을 가려 했단다.

막상 따라갔다가 생활력이 부족한데다 백인 특유의 진상을 부려 쫓겨난 것 같았다.

갈비찜을 해주자 ‘gravy’가 맛있다며 행복하게 꿀꿀대며 밥을 먹는데 우리집이 중세의 태번(tavern)으로 변해버린 줄 알았다.

그는 또한 잠자리를 할 때 ‘대디(daddy)’라고 불리기를 좋아했다.

대디, 오 마이 대디

아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은 아버지가 없는 여자, 혹은 과부에게 남자가 없다는 이유로

온갖 성적인 환타지와 함께 님포마니아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을 좋아한다.

아버지가 없는 여자가 겪는 정신적 어려움을 뜻하는 대디 이슈(Daddy Issue) 역시 이런 맥락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주제 중 하나이다.

프로이트의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개념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대디이슈의 이미지는 대략 불안정하고 유혹적인 눈빛으로 술에 취해 아버지를 대신해줄 남자를 찾는 리틀걸로 상징된다.

나에게 대디 이슈가 있는가?

솔직히 말해 내가 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슈는 사실 성적인 것과는 전혀 다르다.

게다가 여러 파트로 이루어진 다중적인 감정이라서 뭐라고 한가지로 단정해 말하기 힘들기도 하다.

큰 축이 되는 감정은 맥이 빠질 정도로 단순하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서 많이 슬펐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개념에 대한 여러가지 감정들이 들었다. 마치 계절이 바뀌듯 시즌마다 바뀌면서.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대디이슈가 심한 사람들의 아버지는 오히려 살아계신다.

게다가 대디이슈는 보통 남자에게 더 크게 나타난다(이 점 다룰 수 있는 기회가 되면 한 번 다루도록 하겠다)

여자에게 나타난다면 그것은 보통 집안에서 남자 역할을 해야 했던 장녀들이다.

이들은 아버지와 파트너에게 평생 인정을 구걸하며 산다.

인정을 위해 스스로를 갈아내고 감정과 인생이 망가져도 ‘이것만이 길이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결국 아빠가 없는 내가 세상에 이슈를 가지기보다, 세상이 남자없이 살아가는 나에게 이슈가 있었던 기간이 더 긴 듯 하다.

그 일례로 세상은, 실제로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은 여자의 목소리보다,

옥스포드 액센트를 가진 남자가 그리는 남자의 관심을 갈구하는 신비로운 동양 소녀의 성적 타락 이야기에 더욱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보통 남자는 신이다

아버지가 부재하기에, 나에게 보이는 세상의 남자들은 아버지나 남자의 신화로 희석되지 않은, 또렷한 인간형들이다.

내가 보는 한국 남자는, 한국 남자 스스로가 보는 자신의 모습과는 아주 다르다.

황정민이나 송강호, 최근에는 박정민이 한국남자 스스로가 생각하는 한국남자상을 반복해서 연기하는 것 같다.

소박하고 서민적이고, 조금 모자란 면도 있지만 워낙 위기 극복 능력이 좋고 정의감이 살아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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